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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덟, 나는 꼭 지금의 일을 직업으로 삼아야 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함께 해 온 친구. 늦은 결혼으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김포의 양말 공장에 아르바이트를 다니던 그는, 이제는 본격적으로 섬유 산업으로 뛰어들어서, 지금은 역삼동 소재의 모자 회사에 다니고 있다. 나는 그의 카카오스토리에서 베트남 출장의 기록을 볼 때마다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이국의 풍광과 먹거리를 담은 사진, 즐거워 보이는 그의 이국에서의 일상을 훔쳐볼 때마다, 부럽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가끔씩 보내오는 알 수 없는 베트남어의 인사에 마냥 웃음밖에 안 나온다.

역시나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함께 해 온 친구. 20대초부터 할아버지의 음식점을 물려받아서 장사를 시작했던 그는 이제는 어엿한 횟집의 사장님이다. 그는 할아버지의 고깃집을 물려받아서, 횟집으로 바꾸는 것에 성공했다. 앞서 말한 친구의 소박함과는 다르게 으리으리한 집, 비싸 보이는 외제차,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해외 여행의 사진으로 가득하다. 그는 대학, 공부보다는 안정적인 삶을 선택했고, 결국은 자신의 선택을 성공으로 만들었다.

어느 고등학교 친구. 어린 시절, 함께 길에 떨어진 컴퓨터의 부품을 모아서 분해와 조립을 반복하고, 프로그래밍을 공부했던 친구. 지금은 문래동 소재의 어느 영세 로봇회사에 다니면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이력서가 수십 줄이 넘어가는 나와는 다르게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갔던 첫 번째 직장에서 둥지를 텄고, 그렇게 한 직장을 약 13년간, 장기 근속했다고 한다. 연봉은 의외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적었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의 연봉을 만족한다고 했다. 가끔 중국 등지로 출장을 떠나는 것을 보면, 역시나 부럽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국민학교 친구. 수십 년간 연락이 없었던 그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바로 엄마가 다니는 교회. 어린 시절, 집요하게도 나를 교회에 데리고 가려고 했던 어느 전도사님의 아들. 그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공부에 매달렸고, 의사 선생님이 되었다. 지금은 몸이 좋지 않은 탓에 지방의 좋은 곳에서 스스로 자신의 몸을 치료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형 역시, 화곡역 앞, 어느 한의원의 원장님. 형제 모두 의사가 되었고, 부모, 사회가 결정해 준 미래를 따랐지만, 지금은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눈치다.

국민학교, 중학교를 함께 해온 친구. 우리 집, 바로 뒷집의 아이. 나와 마찬가지로 왼손잡이, 야구를 좋아하던 그는 지금은 사진작가가 되었다. 얼마 전까지 남수단에 촬영을 다녀왔던 그는, 지금은 페이퍼지 등에 소개되기도 하고,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전시회를 열기도 하고, 연일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그 밖에도 내 주변의 많은 사람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고, 안정적인 직장에서 장기근속하거나, 사업을 하고 있다. 저마다 살아가는 모습은 다르지만,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것 같다. 그리고 모두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빛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고 있는 것 같다. 늦은 나이, 나처럼, 심각하게 다음 직업을 고민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어머니의 병으로 약 2년여의 병시중, 그 앞서 방황으로 1년여의 휴식, 약 3년여의 공백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올해도 몇 가지의 일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병원에서 선고한 어머니의 여명이 가까워지고 있어서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다시 설계로 돌아가려고 해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진지하게 다음 삶을, 미래를 생각해 보고 있다. 이번에 바꾸는 직업이 평생의 직업이고, 마지막 직업이 될 가능성이 크다. 어떤 일을 직업으로 삼아야 할지, 깊이 고민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이제 건축에서는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엄마의 가슴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게 한 건축, 이제는 그만두어야 한다.

CAD, 스케치업, 라이노, V-Ray, 엑셀,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그밖에 업무적으로 약 33가지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나. 오늘도, 나는 새로운 업종으로의 이직을 희망하면서 워크넷에서 업무적으로 공유하는 프로그램을 키워드로 열심히 검색해 봤다. 역시나 목록에 뜨는 것은 전부 건축사사무소뿐이다. 이 난국을 어떻게 빠져나와야 할지 모르겠다.

갑자기 어머니에게 찾아온 병으로, 최근 먹거리에 대해서 신경을 쓰게 된 나는, 뒤늦게 요리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외식산업의 종사자들이 전부 고학력자였다. 화려한 해외 수련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놀랐다. 

 

현재로서 고졸의 나를 부르는 유일한 사람은 동네 정육점의 할아버지이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갈 때마다 할아버지는 마치 나에게 들으라는 듯이 혼잣말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3개월을 하고 6개월을 했다고 하고, 6개월을 하고 1년을 했다고 하면 된다."
"초봉도 적지 않다."
"머리가 아니라, 손의 감각으로 하는 단순한 일이다."
"월급이 밀리지 않는다."
"정년이 없어서, 네가 원하면, 평생 할 수 있다."
"군대에 가기 전에 이 일을 시작해서, 지금은 빌딩을 하나 갖고 있다."

매일, 할아버지는 온갖 감언이설과 함께 나에게 너무 진지하게 앞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지를 물어온다.

서른 여덞, 나이 마흔을 앞둔 지금, 어떻게 다른 직종으로 넘어가야 할지 모르겠다.

어린이 날,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어린이 날이다.

지금의 나는 미아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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