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림프 부종으로 팔을 접었다 펴는 것도 힘들어하는 엄마는 오늘도 같은 말만 반복했다. "괜찮다." 이제는 늘 같은 말만 반복해 오던 엄마의 체력도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진료를 받고 돌아오는 길, 엄마는 한동안 망설이는 눈치였다. "택시를 타고 집에 갈까." 엄마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지하철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뚱뒤뚱 꽃게처럼 옆으로 한 걸음씩을 내디뎌서 아슬아슬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엄마를 바라보면서, 한없는 눈물을 쏟았다. 이 작은 소원 하나를 들어줄 수 없어서 미안할 따름이었다. 주치의께서는 첫 내원 당시의 여명을 약 반년으로, 항암이 잘 진행되던 때는 길어야 최대한 1년 반을 더 살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씀하셨다. 항암으로 약 23개월째, 엄마는 조금..
함께 하는 항암, 점점 지쳐가는 엄마와 나. 우연히 들른 어느 카페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이가 먼저 채팅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는 다짜고짜 나에게 집의 주소를 물었다. 익일 도착한 택배 상자를 열어보니, 꼬깃꼬깃 정성스럽게 신문으로 감싼 포장과 함께 이버멕틴, 메벤다졸, 알로홀, 사탕이 담겨있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베푸는 인정에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어떻게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 나는 그의 주소가 적힌 택배 상자를 고이 간직해 두고 있다. 어서 일을 구해야 할 것 같다. 갚아야 할 마음의 빗이 가득 쌓이고 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에게 찾아온 병으로 세상이 일그러져 보이기 시작하던 때도 있었다. 오랜 항암으로 지치기 시작하던 때는 모두 놓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장기간, 알벤다졸을 복용하면, 간 수치가 폭발적으로 뛰어오르고, 신장이 녹아내려서 망가지고... 세상은, 마치, 알벤다졸을 독약처럼 몰아가고 있다. 하지만, 약 50여 일을 쉬지 않고, 먹어 본 소감은... 매일 먹어도 아무런 느낌도 없다. 엄마가 먹는 항암제의 부작용을 눈으로 지켜봐 온 나로서는, 오히려 정말로 이 정도의 약으로 항암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뿐이다. 어지럼증과 두통은 알벤다졸을 먹기 전부터 있던 증상이었다. 알벤다졸을 먹는다고, 개선되지는 않았다. 인터넷에서 읽은 뇌종양의 증세와 많이 닮아있지만, 어떤 분의 말씀으로는 뇌졸중의 전조증상과도 닮았다고 한다. 어쨌든, 머리에 문제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지난 약 2년간, 엄마의 병수발하면서, 머리에 이상이 찾아왔다. 첫 시작은, 어지럼증이었다. 걸음걸이가 부정확해지기 시작했고, 요즘은 머리가 쥐가 난 것 같이 따끔거리고, 뒷목이 뻐근하고, 눈을 들어올리기 힘들고, 눈동자가 진동하는 것 같고, 초점이 안 맞아서 제대로 글을 읽을 수 없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찍어서 따라가야 스마트폰의 문자를 겨우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혀가 굳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발음이 부정확해지기 시작했다. 엄마의 병수발을 하면서, 거의 매일 술을 마시게 되었고, 요즘은 마지막 기억이 없다. 엄마는 내가 자주 쓰러진다고 한다. 솔직히, 나는 내가 뇌종양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본 뇌종양의 초기 증상과 매우 유사하다. 우리 형편에 한 집에 두 명의 암환자는 무리..
아침 일찍 일어난 엄마, 곧 엄마는 소가 밭을 갈아엎듯이 집안 곳곳을 뒤집어엎기 시작했다. 그렇게 엄마는 하루 종일 마음의 짐들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마대, 수십 자루의 짐을 털어버려야 했다. 그중 가장 많은 것은 바로 구두였다. 유난히 신발, 구두를 좋아했던 엄마. 하지만, 이제 엄마는 그토록 아끼던 구두들을 망설임 없이 버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엄마는, 갑자기 칼국수를 끓이기 시작했다. 양파의 껍질 몇 점, 다시마가 몇 장, 멸치가 한주먹, 엄마는 내가 보는 앞에서 눈으로 칼국수를 끓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오늘, 나는 엄마에게 '칼국수'를 배웠다. 새우 하나 가득, 푸짐한 칼국수, 하지만, 나는 채 몇 젓가락을 먹지 않고 젓가락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떨어지는 눈물은 ..